비교우위 이야기 5 - 모직물은 영국경제의 알파요 오메가
중세 잉글랜드에서 양모 생산은 큰 사업이었습니다. 중세 이후 양모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주로 모직물을 생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따라 농부에서 대토지소유자들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을 길렀습니다.
처음에 잉글랜드인은 자국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모직물을 제조했고, 따라서 모직물 수출은 미미했습니다. 해외로 팔려나간 것은 잉글랜드의 양에서 나온 가공되지 않은 양모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직조기술자들은 플랑드르 지역에 살았습니다. 브뤼헤, 겐트, 이프레스 등지의 부유한 모직물 제조 도시들은 영국 양모에 높은 가격을 지불했습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말까지 양모는 중세 잉글랜드 경제의 중추이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무역은 “왕국의 보석”이라고 불렸습니다. 양모 무역이 증가하면서 영주, 수도원장, 주교를 포함한 대지주들은 그들의 재산을 양떼의 수로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수출되는 모든 양모에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이득을 얻었습니다. 북부부터 남부까지 잉글랜드 전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양들이 양모를 얻기 위해 사육되었습니다. 당시에 양모시장에서는 플랑드르와 이태리의 상인들이 많았고 이들은 귀족과 농민을 가리지 않고 양모를 현금으로 사들였습니다. 양모 뭉치는 마차에 실려 보스톤, 런던, 샌드위치, 사우스햄튼 등의 잉글랜드 항구로 보내졌고 거기서 다시 안트워프와 제노아로 선적되었습니다.
당시 대토지소유자들은 해외의 모직물 제조업자들과 직접적인 무역 관계를 맺었지만, 농민들은 이동 양모 상인들과 거래를 계속했습니다. 대토지소유자들은 중개인을 없애고 대량 거래를 함으로써 훨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분리가 시작된 이유가 양모 무역 때문이라고 말해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시기 왕들은 양모 무역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매겼습니다.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년)가 시초였습니다. 양모 무역이 성행하자 그는 양모 수출에 무거운 세금을 매김으로써 군비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90년까지 잉글랜드에는 약 500만 두의 양이 있었고 매년 3만 뭉치의 양모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부터 한 세기 뒤인 헨리 5세(재위 1413~1422년) 치하 때 왕실 총세입의 거의 63%가 양모에 대한 조세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양모는 거의 국부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에드워드 3세(재위 1372~1377년)는 왕실 재정에 양모 세금이 중요함을 깨닫고 플랑드르 지방과의 양모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플랑드르의 모직물 도시의 부자들이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의 지배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청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백년전쟁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세금이 양모 무역을 위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에서 모직물 생산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피신을 한 플랑드르의 직조업자들은 잉글랜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은 주로 노포크와 서포크에 정착했습니다. 웨스트컨트리, 코츠월드, 요크셔데일스, 컴버랜드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지역들의 농촌과 도시에서 모두 모직물 산업이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 전역에서 부유한 모직물 도시들이 등장했습니다. 모직물로 축적된 부로 중세 잉글랜드에서는 많은 수의 대성당이 세워졌고 수천 개의 석조 교회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밖에 많은 교량과 성채, 대학, 세무서, 대저택이 모직물 산업에서 나온 돈으로 지어졌습니다.
15세기까지 잉글랜드는 내수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모직물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수출했습니다. 모직물업자들은 자신의 작은 오두막에서 일하면서 원모를 모직물로 만들어냈고, 이것들은 브리스톨, 글로스터, 켄들, 노리치의 시장에서 판매되었습니다.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7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일어난 산업혁명기에 기계화된 새로운 방적 및 방직기술이 출현했습니다. 그 결과로 영국 북부 지역에 양모 가공 공장들이 급속히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공장을 가동시킬 가파른 언덕과 풍부한 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직물 제조업의 산업혁명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도시 중의 하나가 리즈였습니다. 리즈는 말하자면 양모 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리즈-리버풀 운하와 리즈와 해안을 연결하는 철도망과 같은 다양한 수송 루트가 건설되어 완제품 모직물을 전세계로 수출하는 통로를 제공했습니다.
양모 생산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도 확산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대토지소유자들과 농민들도 양모에서 큰 이윤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7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서 일어난 일은 스코틀랜드 역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입니다. “하이랜드 청소”(Highland Clearances)라고 불리는 이 사태에서 토지소유자들은 자신들의 광대한 토지에서 소작농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집과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토지를 경작지에서 목축지로 바꾸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지역에서 기근과 죽음이 이어졌고 하이랜드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사태 이후 많은 하이랜드 주민들이 고국을 떠나 신세계, 주로 미국과 캐나다의 동부 해안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양모산업이 일으킨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중세의 양모산업은 “그 이후 이어진 잉글랜드 역사의 초석”이었습니다. 양모산업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대규모 상업을 갖게 되고 시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산업에서 벌어들인 자금으로 도시와 농촌 마을에 교회와 세무서와 곡물창고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무역은 농촌의 풍경을 거대한 초원으로 영구히 바꿔놓았습니다. 숲이 파헤쳐져서 목초지로 바뀌고 수천 에이커의 공유지에 울타리가 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 목축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양모 무역의 이익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은 양치기가 아닌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축적한 이윤은 오늘날까지 영국 시골에 남아 있는 성당, 수도원, 성채, 개선문, 창고, 교회를 지을 수 있게 했고, 무엇보다도 다음 단계의 상업 기업에 투자되어 산업과 제국의 번영을 가져왔고 노예제도의 출현을 가져왔습니다.
양모는 잉글랜드인의 사회 조직 및 상업 조직을 지지하는 조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토지소유제도와 법률, 분쟁해결 메커니즘, 정치제도, 학교제도, 모든 관련 산업과 서비스(수송, 저장 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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