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일). 아침 식사 시간까지 남은 시간에 호텔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호텔 건너편에 고쿠부 강(태평양으로 빠짐)과 연결되는 작은 하천이 있고 뒤로는 JR 고치역이 있습니다. 하천 주변에 산책길이 조성된 구간이 있어 그곳을 통과해서 고치역으로 갔습니다.
고치역
고치역 앞 한쪽에 고치 출신의 일본 근대화 무사 3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를 중심으로 왼쪽에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1829~1865), 오른쪽에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1838~1867)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이라고 합니다. 사카모토는 무사, 지사, 사업가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방안으로 처음에는 존왕양이 사상을 옹호했으나 개화론자의 사상에 감복하여 개화사상으로 전향했다고 합니다. 사카모토는 번과 막부의 통일을 주도하고, 1867년에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의 권력을 메이지텐노에게 반납하는 조치) 구상을 포함한 선중팔책(船中八策, 메이지유신의 기본이념이 된 근대화 개혁 조치)을 공표했습니다. 이로써 중앙집권제의 확립, 의회제도와 근대 법제 등 민주정의 기초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당시 31세이던 사카모토는 그 직후 교토에서 암살됩니다. 사카모토는 조선 말기의 개혁정치가 김옥균(1851~1894)과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둘 다 자국의 근대화를 꿈꾸고 시도했고, 그 와중에 젊은 나이에 반대파에 암살됩니다. 둘의 다른 점은, 사카모토는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나 김옥균은 삼일천하로 실패했다는 것.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 정부의 도움을 청했으나 외면받고, 오히려 도쿄에서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오가사와라로 쫓겨가는 등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결국 중국 상하이로 옮겨 권토중래를 꿈꿨으나 도착 직후에 고종의 밀명을 받은 홍종우에게 암살됩니다.
오늘 첫 일정은 카가와현 가논지시(市)의 아리아케하마 해변입니다. 고치시에서 북쪽으로 1시간가량 80킬로미터를 치고 올라가 세토내해를 만나는 곳입니다. 이곳의 제니가타수나에(
銭形砂絵)를 보러 간 것입니다. 이 해변은 바다에서 밀려온 모래가 언덕을 만들어 사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사구에 송림이 우거져 있는데, 이 안에 큰 모래밭을 만들고 거기에 옛날 화폐 모양의 모래조각(동서 길이 122m, 남북 길이 90m)을 새겨뒀습니다. 주변에 가면 동전 모양은 안 보이고 넓은 모래밭만 보입니다. 인근에 있는 칸노지라는 절이 있는 언덕에 올라가면 화폐 그림이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는 동전 조각까지만 들어가 봤습니다. "왜 돈 모양을 새겼을까"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절에서 돈을 내려다보며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빌라고 그리했을까요?
* 일본측 자료를 찾아보니, 이 모래그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1) 에도시대 초기에 이곳을 찾은 마루가메 번의 영주인 이코마 타카토시 왕자를 환영하기 위해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설, 2) 에도 시대 말기에 영주 쿄고쿠 가문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고 합니다. 기원이 뭣이든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공통 사실이지만, 왜 하필 "돈"(에도시대 통화인 寛永通宝,)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 도시에 관영통보 주조소라도 있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런 설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곳에 이런 뜬금없는 모래 작품을 만들었다면 여론이 들끓었을 것 같은데요. 일본과 우리의 문화 차이라고 이해해면 될까요?
다음으로 간 곳은 카가와현 미토요시의 치치부가하마(父母ヶ浜) 해변입니다. 해 질 녘의 풍경이 아름다워 젊은이들의 인별 성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 잠시 둘러보고 카페에 들어가서 시원함을 즐겼습니다. 저녁에 들르면 노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나, 다카마쓰에서 왔다가기에는 너무 멉니다.
점심은 카가와현 마루가메시의 교외에 있는 "나카무라우동 "에서 먹었습니다. 이 집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주문하면 면을 바로 삶아서 내주고 고객에게 토렴을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얹을 튀김을 추가해서 계산을 하면, 자리를 잡고 먹을 수 있습니다. 바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나 안에는 비교적 손님이 적어서 쾌적하게 우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역시 면발, 국물 모두 맛있네요.
점심 후 찾아간 곳은 시코쿠 88절 순례길의 출발점인 료잔지(霊山寺)입니다. 나카무라우동집이 있는 마루가메시에서는 역시 꽤 먼 곳에 있습니다. 80킬로미터, 1시간가량.
잘 알려져 있듯이 시코쿠 88절 순례길은 헤이안시대 진언종 창시자인 코보(弘法) 대사(774~835)가 수행하면서 관계를 맺은 88개의 절을 도는 길입니다. 이 순례 행위를 오헨로(お遍路)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 오헨로의 1번 절이 료잔지입니다. 아래 그림이 대충 그려본 88개 절의 번호순 연결선입니다. 시코쿠의 전역을 거의 망라하며, 총길이가 1,200킬로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료잔지는 평지에 있는 절로서 오헨로의 출발점인 만큼 오렌로 등록을 받고 삿갓, 의복, 지팡이 등 필요 물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데다가 출발점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이 드나듭니다.
료잔지에서 우리는 88번절인 오쿠보지(大窪寺)로 이동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여기도 거리가 4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오쿠보지는 산속에 있고, 사람이 드뭅니다. 산속에 있으니 한국 절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가 납니다. 절 한쪽 끝에 코보 대사의 석상이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88절 순례를 끝낸 오헨로상이 놔두고 간 지팡이(지팡이는 코보대사의 분신으로 취급받는다고 합니다)를 모아둔 곳도 있고요. 뜬금없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를 기리는 영원의 불도 모셔져 있습니다. 갑자기 우리 한국인 희생자들(히로시마 3만, 나가사키 1만 명 추정)의 원혼은 누가 달래나 하는 비참한 생각이 스쳐 가기도 했습니다.
* 시코쿠의 88절은 한반도와 인연이 많습니다(노성환, ⌜조선피로인이 일본 시코쿠에 전승한 한국문화」, 민속원, 2018). 코보대사의 부모는 각각 신라계 이주자와 백제계 이주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코보대사의 스승이 3명인데 이들도 한반도 이주자 후손입니다. 88절 중 33개의 절이 코보대사보다 100년 앞서 일본에 불교를 퍼뜨리는데 기여한 위대한 스님 행기(608~749)가 세운 절이라고 합니다. 행기스님도 백제계 후손입니다. 88절 중에는 신라신을 수호심으로 모신 사원으로 36번 취봉사, 76번 금창사가 있습니다. 34번 종간사와 44번 대보사에는 백제사람들이 만든 본존불이나 관음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51번 석수사를 비롯한 7개의 절에는 조선 불화와 불상, 범종이 있습니다.
오늘의 공식 일정은 이것으로 끝. 13인 단체여행도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다카마쓰로 돌아가서 효고마치 아케이드쇼핑몰에서 쇼핑하고 호텔 건너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여행을 끝낸 홀가분함, 오랜만에 먹는 모둠 생선회 차림으로 즐겁게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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